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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연 해설위원 KBO 총재가 되다

by Daily Thanks 2022.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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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연 해설위원 KBO 총재가 되다.

"국민 해설가" 허구연 MBC 해설위원(72세)이 한국 프로야구 KBO 총재로 추대되었습니다. MBC 해설위원으로만 40년 동안 야구 해설을 해오고 있는 허구연 해설위원이 총재가 되면 24대 총재가 됩니다. 그리고 그동안 정치인, 경제인 등 야구와 무관한 인물들이 총재를 하면서 많은 문제를 만들기도 했던 KBO 총재는 한국야구위원회 KBO를 대표하고 관리를 총괄하는 자라입니다.

 

KBO 총재의 임기는 3년이며 "총재가 결정하는 지시, 재정, 재결, 제재는 최종 결정이며 위원회에 속하는 모든 단체와 개인에게 적용"될 정도로 막강한 권한과 권력을 갖고 있습니다. KBO 조직은 총재를 정점으로 사무총장과 운영본부장이 담당하는 사무국, 마케팅 사업을 벌이는 자회사 KBOP, 심판위원회, 기록위원회, 기술위원회, 육성위원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비상설 기구로 상벌위원회, 규칙위원회와 야구원로자문위원회(위원장 어우홍)를 두고 있습니다.

그동안 야구인 중에서 KBO의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던 사람은 바로 허구연 위원과 함께 우리나라 해설위원 양대 산맥이었던 고 하일성 해설위원(KBS)이 2006년 1월부터 2008년 12월까지 KBO 사무총장을 역임한 것이었습니다. 하일성 사무총장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야구 금메달과 2009년 제2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준우승하는데 기여했습니다.

고 하일성 해설위원과 허구연 총재

1951년 경남 진주에서 출생한 허구연 총재는 야구 명문 경남중학교와 경남고등학교를 거쳐 그 당시 실업리그 상업은행에서 1년 동안 선수로 뛴 후에 체육특기생으로 고려대학교에 진학(71학번 체육과, 72학번 법학과)했습니다. 주 포지션은 2루수로 고려대학교 입학 이후 고려대 야구부에서 1학년이  3, 4번 타자로 기용되어 1972년에 대학 야구 홈런왕에 등극할 만큼 타격에서는 인정받는 선수였습니다. 고려대학교를 졸업한 허구연 총재는 1975년에 김응용 감독이 있던 한국 최고의 실업팀이었던 한일은행에 입단해 올스타에 뽑히는 실력을 갖췄지만 1976년 한일 올스타전에서 입은 큰 부상으로 결국 1978년도에 마지막 타석을 홈런으로 장식하며 선수생활을 은퇴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1982년 한국프로야구가 개막하면서 본격적인 해설위원의 길을 걷기 시작했지만 1985년 10월에 역대 최연소 나이인 만 34세에 한국 프로야구 원년 팀이었던 청보 핀토스 감독에 취임했습니다. 하지만 1986년 개막 이후 7연패의 수모를 당하는 등 부진한 성적(15승 2무 40패)으로 인해 그해 8월에 경질되고 롯데 자이언츠와 메이저리그 토론토 블루제이스에서 코치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롯데 자이언츠 코치에서 물러난 이후 1992년 MBC 해설위원으로 복귀해 KBS 하일성 위원에게 대중적인 인기나 지명도에서는 밀렸지만, 전문적인 해설로 젊은 야구팬을 중심으로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특히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월드베이스볼클래식 등 국제경기 중계와 박찬호, 류현진 등의 메이저리그 중계, 야구 환경에 대한 쓴소리 등으로 많은 지지를 받아 해설계 1위 자리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청보핀토스 감독시절 허구연 총재

 

허구연 총재는 행정 경험도 풍부한 편으로 대한야구협회 이사를 역임했고, KBO 기술위원장, 기술위원회 부위원장, 야구발전위원장, 아시아 야구연맹 기술위원회 위원장, KBO 총재 고문 등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돔 구장 건설 등의 국내 야구 인프라 확충에 헌신해 왔고 NC 다이노스와 Kt 위즈 창단에 기여하면서 야구 저변 확대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습니다.

 

사상 첫 야구인 출신의 KBO 총재가 된 허구연 위원이 대한민국 야구발전과 국제적 위상에 걸맞은 대한민국 야구의 기틀을 다시 튼튼히 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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